가을이 그 향기를 가득 품을 때 쯤이면 꼭 가보고 싶은 오롬이 있다.
"따라비오롬"
가을이 되면 햇빛을 받은 억새의 은빛 물결이 오롬 가득 출렁이는 곳.
몇 년 전 찾았을 때 억새가 사라져 실망했던 그 오롬.
오늘은 따라비오롬을 향해 길을 떠난다.
동부관광도로[지금은 번영(?)로]를 따라 표선 쪽으로 가다 성읍2리 입구 표지판쯤에 가면 입구 조금 못미처 남쪽으로 난 시멘트포장도로가 있다.
그 포장도로를 따라 가다 처음 만나는 오른쪽 비포장도로 한쪽에 차를 세우고, 우리 일행은 목장 길로 들어섰다.
바람을 막기 위해 심어놓은 삼나무 울타리 사이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메밀꽃들이 파란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는 밭을 지나고,
재잘대는 동네 아줌마 물봉선 꽃의 붉은 입술에 입맞춤해주며 길을 가다 보면,
어느덧 길은 가을빛을 가득 담은 초원의 입구를 지나고 있다.
쑥부쟁이, 미역취, 참취, 등골나물, 잔대...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오롬과 들판을 수놓는 많은 야생화들.
억새와 들꽃이 어우러진 들판 멀리, 한라산의 고운 모습이 눈에 받친다.
길을 나선지 20여분.
소나무 숲 언저리를 돌아서는 순간 오롬의 자태가 눈에 들어선다.
아직은 베어버리지 않은 목장 안 억새밭 사이로,
아침 햇살을 가득 받으며,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억새를 미끼로 나그네를 꼬이는 오롬.
따라비오롬이 그 곳에 있었다.
억새의 물결은 아침이나 저녁, 햇살이 역광으로 비출 때가 제멋이다.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흔들며, 햇빛을 받아 일렁이는 억새의 물결은,
조물주가 인간을 달래기 위해 던져 준 선물인양, 덥석 우리의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그렇게 파고든 일렁임은 쉬 가시지를 않는다.
오롬 자락에서 시작되어, 능선을 넘나드는 은빛 물결의 환각에 취해 발을 디디면 어느새 나의 몸은 그 안에서 덩달아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오롬에 들어서면 몸이 가볍다.
내가 오롬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억새의 물결이 나를 오롬으로 올려 보낸다.
파도 위를 타는 서핑처럼, 내 몸은 어느덧 억새의 파도위에 올라가 있고, 그 파도는 내 몸을 오롬의 정상으로 옮기고 있다.
세차게 불어오는 오롬 위의 바람은 어느새 내 몸을 오롬 정상에 올려놓았다.
잠시 바람을 피해 소나무 뒤로 몸을 피한다.
오롬 정상에 올라,
가까이 혹은 멀리 이어지는 오롬의 행렬들을 바라보노라면,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니라는 착각에 빠지고 한다.
『따라비오롬은 3개의 굼부리가 있고, 그 굼부리를 가운데 두고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봉우리가 매끄러운 등성이로 연결되어 하나의 오롬을 이루고 있다. 북쪽을 향해 말굽형으로 열린 방향의 기슭 쪽에는 크고 작은 이류구들이 보인다. 남쪽의 가시리 쪽으로 보면 밋밋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북쪽에서 보는 따라비오롬의 형태는 제주 오롬 중에서 단연 으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가을 억새가 한창일 때 보는 따라비오롬은 황홀 그 자체이다.』
몸을 가눌 수조차 없이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능선을 따라 정상을 향한다. 돌아가는 방향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억새의 빛깔, 능선의 아름다운 곡선미에 더하여 주위에 펼쳐지는 가을 들녘의 모습에 정신을 뺏겨 마음을 놓으면, 불어오는 바람에 몸 또한 중심을 놓아버린다.
정상 기슭,
바람이 어느 정도 비켜가는 곳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땀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바람을 거슬러 오르다 보니 허기가 느껴진다.
이럴 때 내 놓는 간식은 그 어느 음식보다 맛이 좋다.
비스켓, 밀감, 돍의알 등등
일행들이 정성껏 챙겨 온 간식들로 배를 채우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이제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야할 때.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가슴이 아프도록 하얀 물결을 뒤로 하고,
오름 한가운데를 가로 질러 굼부리와 굼부리 사이로 하산 길로 접어든다.
발은 오롬을 내려가는데, 눈은 자꾸만 다시 오롬을 오르고 있다.